서천궁(曙川宮)의 내부를 돌아다니며 소요는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세 아이의 말대로 서천궁의 안쪽은 현무궁과 다를 바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탓에 돌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응접실을 떠나기 전 들었던 이야기였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저 말고는 없다고 하였다. 허나 소요는 분명 물에 빠지는 그 순간까지 다모와 몸을 부둥켜 안은 채였고 힘이 풀려 의식을 잃어가는 그 순간 까지도 소요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다모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 듯한 반응을 쉽사리 믿지 못한 소요가 거듭 확인을 하였으나 현우, 현운, 현설 형제가 내뱉는 말은 다름이 없었다. 

"확실해요.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당신은 바다에 혼자 빠졌어요."

"우리는 절대 틀리지 않는다고요."

"맞아! 혼자였어!"

마치 누군가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짜인 듯한 판에 올라와 춤을 추는 듯한 느낌. 허나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천계의 신 하나를 잡기 위해 벌이는 일이라면 이토록 느슨하고 다정하게 일을 진행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신령석을 얻기 위해 인간계에 내려온 것은 천계의 몇몇 만이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고, 인간계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술에 절어 여관에 누워있는 금령 하나뿐이었다. 다모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애초에 그 자리에 존재하긴 했던 걸까? 바뀐 궁의 이름이 서천궁(曙川宮) 소요전(溯曜殿)인 이유는 무엇이고? 이는 소요의 이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일한 것이었다.

"아."

소요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다모의 행방과 정체에 관심이 팔려 중요한 질문 하나를 놓쳤기 때문이다. 소요는 인간계에 내려올 때부터 줄곧 기도를 올린 인간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기도를 올린 이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 짐작을 했었지만, 궁 안에 누군가가 존재하는 이상 신령석을 만들 만큼의 간절한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그 내용을 물어볼 수 있을 터였다.

"하아..."

하나의 의문을 해결했다 생각했더니 세 가지의 찝찝함이 더해졌다. 천계에서 일을 하고 요괴들을 베는 동안에도 이토록 머리가 아픈 적은 없었다. 1000년의 세월 동안 신관은 물론이요 인간들의 문제와 엮여들 일이 없는 소요였기에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들은 마치 깨끗한 물 위를 떠다니는 기름처럼 소요를 괴롭히고 있었다. 

"...."

그리고,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머리를 굴리던 소요는 어느 순간 생각을 포기했다. 이대로는 신경 쓰여서 도저히 할 일을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만든 판 위에 올라와 있던 말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서천궁 내부를 샅샅이 뒤지며 흑선이 이야기 했던 염원이 담긴 신령석을 찾아 천계로 가져가는 것 뿐이었다. 다모의 정체와 행방이 어찌 되었든 평범한 인간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니니 구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다. 현재 있는 장소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 할 뿐 소요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었으며 과거 기도를 올린 사람이 누구던 염원이 담긴 신상만 제대로 존재하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어.'

원래 계획대로 였다면 소요는 혼자서 이렇게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허나 금령의 도박과 술병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큰 지장을 주었고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은 평생 알지 못하고 넘어갔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틀어진 것들에 신경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소요가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니 서천궁을 둘러보는 속도는 훨 빨라져 발걸음이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현무궁과 똑 닮은 크기이니 가장 넓은 곳인 대전(殿)만을 살펴본다 해도 많은 시간이 들었고, 보통 궁에 하나씩 있는 신상이라 함은 대전 내부에 위치해 있었기에 눈에 쉽게 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요가 방을 몇번이고 살피며 넓디넓은 대전을 돌아다녀도, 신상은 커녕 조각과 같은 것은 코빼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소요전의 한가운데에 신상이 놓여 있던 하나의 흔적과 자국만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들어서 옮긴 것 마냥, 부자연스럽게 푹 파여 꺼져있는 바닥은 소요의 의심을 사기 충분한 것이었다.

"열쇠가..."

소요는 현운에게 받은 열쇠 꾸러미를 들여다보았다. 통로와 통로 사이, 혹은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문을 열어갈 때마다 새어가며 사용 된 것들은 모두 확인을 해두었기에 소요는 더욱 확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낡고 녹슨 열쇠가 하나 사용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적어도 소요전 내부에서 남은 방은 존재하질 않았다. 신상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곳에는 이상한 흔적만이 남아있었으니 이는 필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신상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체 왜..."

현운이 열쇠를 던져주며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상이 있는 곳을 '알아서' 찾아보라고? 애초에 쉽사리 찾지 못하도록 신상을 꼭꼭 숨겨놓고는 골탕을 먹이려는 것이 아닌가. 휑한 대전의 내부에서 소요는 홀로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고 조용한 장소에 서있자니 마치 들리지 않던 이질적인 소리까지 물 속에 섞여드는 기분까지 들었다. 

'흐으으...'

무언가로 입을 막힌듯한 사람의 울음소리.

"울음소리?"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소리는 소요가 환혹술을 부수기 전 벽 너머에서 들었던 소리와 일치했다. 환혹술을 부순 후 눈앞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겨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었는데, 고요한 대전에 혼자 남겨진 탓에 다시금 들려오게 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둘러본 서천궁의 내부엔 울음을 내뱉는 사람이 있는 방 같은 것은 없었으니 이 말인 즉슨 대전의 내부와 연결되는 또 다른 숨겨진 곳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소요는 소리가 들려오는 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귀를 가져다 대었다. 어딘가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는 울음소리가 서천궁 내부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천계의 있는 현무궁과는 차이점이 있는 것이었다. 소요는 벽을 앞에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통로에 갇혔을 때와는 달리 쉽게 주먹을 휘둘러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면식은 없다고 하나 선대 현무신이 직접 지은 궁이었고, 이곳에 살고있는 아이들 또한 존재한다. 그들이 염왕을 따르고 이 곳이 염왕의 수하에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흠집을 내는 것은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이를 어쩐다.'

열쇠 꾸러미를 다시 살펴도 별 소용은 없었다. 열쇠는 이미 모두 사용된 것들 뿐이고 녹슨 열쇠가 남아있다지만 열쇠구멍에 넣기만 해도 부러져 곤란함을 더할 것 같았다. 다른 장치가 있지는 않을지 대전의 벽을 꼼꼼히 살폈지만 눈에 띄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법력을 사용하여 풀 수 있는 술법이 걸려있다면 차라리 편했을 테지만 야속하게도 일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벽은 요지부동인 채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끄으윽...'

벽 너머의 울음소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요의 의문은 이어지는 울음소리에 갈수록 커져만 갔다. 차라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면 제 할 일을 충분히 했다 생각하곤 천계로 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 너머 울음소리가 들리는 공간에 숨겨진 신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소요는 제 손을 곧게 펼쳐 벽에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든 이 너머를 확인해보고 싶었기에 앞서 흠집을 내지 않기로 결심했던 마음을 잠시 접어두었다.

"...작게 구멍을 내는 정도는 괜찮겠지."

무자비하게 부수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벽에 구멍을 뚫는 정도야 법력을 사용해서 다시 메워두는 방법 또한 있다. 어떻게든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의 틈을 만들면...

"...????"

법력을 끌어올리며 제 팔에 힘을 주던 소요는 갑작스레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몸이 앞으로 기울며 벽이 밀리고 애써 틈을 만들 필요도 없이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벽의 안쪽은 울음이 새어 나오는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몹시도 암둔했다. 벽이 밀린 공간 아래에 어두컴컴한 지하로 향하는 듯한 계단이 희미한 촛불에 의지하며 그 길을 밝히고 있었다. 소요는 어이가 없었다. 현무궁과 완전히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각하여 벽을 밀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런 원시적이고 간단한 장치는 천계에 존재하지 않으니 쉽게 생각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일은 확실히 잘 풀려가고 있었다. 소요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계단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 아래에도 실마리가 없다면, 이대로 천계로 돌아가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고 더 이상의 피곤한 일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금령의 잘못이라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으으으.. 흐으으..."

"하아..."

벽의 안쪽으로 들어오니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층 더 선명하고 확연해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소요가 넘어진 몸을 일으켜 계단으로 걸음을 내딛자 희미하게 비춰들던 촛불들은 한층 더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너무나 어두운 탓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벽의 홍등들 또한 붉게 빛나며 소요의 앞길을 밝혔다. 삭막한 돌벽을 가리는 붉은 융단과 차례대로 비춰드는 붉은 빛이 한치의 빠짐도 없이 지하 계단의 끝으로 향했다. 마치 발을 헛디디어 구르기라도 할까 배려를 하는 듯한 섬세하고 오묘한 기분이 감돌았다. 울음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분위기에 소요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우우우..."

울음이 끊이지 않는 탓에 분위기가 가라앉기는 했으나, 붉게 빛나는 홍등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길을 묘하고 애틋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빨갛게 빨갛게 물들어 타오른다. 우습게도, 소요는 이런 붉은 길 속에서 자연스레 이번 일의 원인인 염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자의 머리카락 또한 이토록 붉었었지. 아니,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 가을 저녁의 노을만큼 붉었던가, 목을 베면 떨어지는 핏줄기 만큼 붉었던가. 어느 쪽이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본디 붉은 색이란 것은 찰나의 순간에도 뇌리에 박힐 만큼 자극적인 것인지라 소요는 제가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겼다. 가능하다면 그와 마주치지 않고 일을 끝낸 다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생각보다 그 길이가 길었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 계단이 시작되었던 입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래로 향하는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대강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 위해 소요는 홍등의 개수를 하나씩 세어보기도 했는데, 그 수가 100을 넘어가고 나서야 울음이 시작되는 근원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계단 끝에 있는 근원지의 시작은 작은 나무문으로 막혀 잠긴 상태였으나, 소요는 열쇠들 가운데에 남겨진 마지막의 것을 떠올리곤 거침없이 문의 구멍에 꽂아 넣었다. 잠금을 풀기 위해 열쇠를 돌려 보이자 녹이 슬었던 열쇠는 단번에 뚝 부러져 버렸다. 

나무로 만든 문은 꽤 낡아 보였으나 깔끔한 상태였다. 마치 오랫동안 애지중지한 골동품을 보듯 정갈한 기분이었으며, 문을 열었을 때 그 너머로 펼쳐지는 광경은 지나온 통로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거대한 밀실(密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황홀한 풍경. 그 크기가 적지 않아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공간이란 것이다. 서천궁의 장식과는 뒤처지지 않을 정도의 영롱함과 물에 잠긴듯한 신비로움, 의아한 것은 기둥에 감겨 있는 금줄과 특이한 형태의 부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대전과 같아 보이는 밀실은 그 양옆엔 방으로 통하는 듯한 무언가의 입구가 즐비해 있었으며, 소요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하곤 신상의 위치에 관한 확신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을 것이다.'

마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꾸며진 것만 같은 장소였다. 소요는 아까부터 끊이지 않던 울음소리가 어쩌면 기도를 하는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문을 받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워 보였으나, 몸의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을 겪으며 울음을 내뱉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소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밀실의 내부로 들어섰다. 한시도 끊이지 않은 울음이 한층 더 커진 기세로 울려 퍼진다. 컥컥대는 소리가 공허한 내부를 때리며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두워.."

밀실의 내부는 푸른 빛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으나 양옆으로 존재하는 문이 없는 방 안은 발이 쳐져 있는 데다 하나같이 어두컴컴하여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소요는 가까이 있는 등불 하나를 빼 들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등불을 들고 방에 들어서기 이전. 소요는 무언가 비릿하고 소름 끼치는 냄새에 제 표정을 묘하게 일그러트렸다. 아주 오래 지난듯한 피의 비린내. 울음과 섞여드는 비릿한 냄새는 그 등골을 쭈뼛 세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소요는 직감했다. 적어도 이 안엔 정상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지 않을 것이다. 

"..."

창백한 손이 발의 끝을 들치자 줄줄 새어 나오던 소리는 단숨에 잦아들었다. 이어서 쇠붙이가 부딪히며 나오는 파열음과 살과 벽이 맞닿아 비비적 거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졎혀진 발 너머로 등불을 비추자 보이는 것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살덩어리였다. 소요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 눈빛이 일그러진다. 불쾌함을 감추지 못해 찌푸려진 미간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평범한 살덩어리가 아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에 시선이 그리 비춰들었을 뿐, 쇠사슬에 달려 허공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는 사지가 잘린 사람이었다. 그것도 살아있는 채로. 그는 확연하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으윽..."

혀조차도 잘린 것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사내처럼 보이는 이는 거꾸로 매달려 뭉툭하게 잘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몸을 흔들 때마다 썩은 살점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으며 이미 빛이 꺼진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탁해져 있는 상태였다.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이리 매달려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몸엔 핏자국이 가득하며 잘린 팔다리는 그와 조금 떨어진 벽에 묶여 싸늘하게 대롱인다.

"이게 대체..."

거꾸로 매달린 남자는 계속해서 몸부림을 쳤다. 소요의 기분 탓인지 잠시간 시선이 스쳐 지나간 이후로는 그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며 멈춰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요는 등불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후 매달려 있는 남자가 풀려나는 것을 도왔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곳에 이런 모습으로 묶여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녹슨 쇠사슬이 풀리고, 털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뭉툭한 살덩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흐으으... 끄으윽..."

풀려난 남자는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한 채 바즈락대는 남자를 보며 소요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하는 대로 일이 풀린다 여겼지만 어찌 되었든 이곳은 염왕의 휘하에 있는 곳이었다. 잠시를 망설이다간 자신도 이 남자와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 본래의 힘이 있었다면 상대가 누구던 가리지 않고 베어버렸겠으나 지금의 소요는 약간의 법력만이 존재하는 볼품없는 하나의 신일 뿐이다. 

"..."

소요는 말없이 엎어진 남자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잘렸다지만 어떻게든 업고갈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 이 곳을 벗어날 거라면, 절대로 혼자 가서는 안된다. 사지가 묶인 채 이토록 고통받고 있는 이를 어떻게 혼자 두고 간단 말인가. 이후 치료를 위해 마을에 두고 천계로 올라가는 한이 있어도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이 공간에선 함께 탈출해야 했다. 소요가 뭉툭하게 잘린 남자의 어깨를 감싸들었다. 피가 딱딱하게 굳고 썩어든 살갗이 질척하게 파여 이질적인 느낌이 더해졌다. 

"앗....!"

"흐어... 으아아아!!!"

소요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부축을 하던 소요와 눈을 마주한 남자는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펄떡이기 시작했다. 없는 팔다리를 휘적이며 소요에게서 떨어지려 애를 썼고, 입에선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새어 나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소요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남자는 기절할 듯 눈을 까뒤집으며 히익- 하는 새된 소리를 흘렸다. 몇번이고 닿으려 시도를 했으나 옷에 핏자국과 썩은 살점이 묻어 더러워질 뿐 그를 제대로 마주할 수는 없었다.

"ㅁ...ㅣ...아...미아...ㄴ...."

"방금 뭐라고..."

잘린 혀 사이로 어눌한 말이 들려오자 소요가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줄곧 울기만 하던 이가 처음 내뱉는 말이다. 소요가 다급하게 되물었으나 남자는 흥분하여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헐떡이며 입가 사이로 피를 내보이질 않나, 어눌한 발음에 끝내는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돌바닥에 처박기도 했다. 완전히 미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습에 소요의 표정에 당황이 깃들었다.

쿵- 쿵-

비명을 지르며 어눌한 말을 내뱉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자는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돌조각이 머리에 박히며 뼈를 부수는 소리가 울린다.

“그만...!”

말려야만 한다. 팔과 다리가 잘린 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상처를 입는다면 손을 쓸 틈도 없이 죽어버릴 것이다. 소요의 손이 엎드린 남자의 어깨에 닿았다. 어찌나 떨고 있는 것인지 그 몸의 진동이 확연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금 남자를 일으키려던 때, 고요했던 발(簾)의 틈 사이로 뜨거운 온기가 흘러들었다. 돌연 불어오는 열풍과는 다르게, 무언가의 살기가 꾸물꾸물 기어들어 와 중압감을 주었다. 희미하게 비치던 등불은 힘없이 사그라들었고 이어지는 것은 텁텁한 공기속에 스며드는 암흑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필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제 등 뒤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열기에 식은땀이 흘러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든다. 보지 않아도 확연히 느껴지는 기운에 등골이 시렸다. 소요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제 등 뒤에 있는 것은, 그토록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단 한 사람 이라는 것을. 염왕이라고 불리는 서천궁 소요전의 주인. 앞서 만난 세 아이가 마음을 바꿔 소식을 전했는지 그의 아래에 있는 궁을 둘러보기 위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리 마주치는 것은 몹시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

일이 잘 풀리는 탓에 너무나도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첫 만남 때 무자비하게 목을 베어버린 것을 기억한다. 이렇게 얽혀들 줄 알았다면 그때 존재를 소멸시켜 놓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지독한 악연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차륵-

조심스레 발이 들춰지는 소리에 소요는 제 팔에 힘을 주었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지금의 상태로 싸워봤자 득이 될 것이 없으니 도망갈 틈을 찾아야했다. 섣부르게 움직이다간 참혹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을 데려갈 수 있을까.'

뚜벅이는 발걸음이 점점 소리를 키우며 다가온다. 짧은 고민을 하는 사이 묵직한 발걸음은 소요의 등 뒤에 닿아 그 흉흉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열기가 일렁이며 실낱같은 것들이 주변에 날아든다. 붉은 머리카락이 양쪽 시야에 깃들었다. 어둠에 적응된 눈이 강렬한 붉은색을 마주하며 가늘게 뜨인다. 바다에 빠져 의식을 잃기 전에도 같은 풍경을 본 기억이 있다. 그저 붉은 색의 실이라 여겼을 뿐이었는데, 환혹술에 걸려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다름 아닌...

"연홍서..."

"부르셨나요?"

소요가 중얼거리자 낮은 미형의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틀림없는 염왕의 목소리였다. 숨을 내뱉으며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에 소요가 고개를 돌렸다. 허나 단단한 가슴에 가로막혀 소요는 일순간을 주춤였고, 이어지는 것은 나지막이 이어지는 따스한 포옹과 피가 묻어 축축하게 젖은 손을 감싸오는 온기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폭포수 처럼 쏟아져 내리며 소요의 눈 앞을 가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은 몹시도 단단했으며 어느새 깍지를 꼈는지 마디마디 부드러운 손길이 베인 손바닥 사이에 맞닿았다.

가느다란 숨결의 기운과 함께, 등 뒤에서 풍겨오는 복사꽃 향기는 너무나도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정말 많이 그리웠어요."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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